■ ‘현대판 백락’ 김영관 조교사… 29일 마지막 레이스
10대때 기수로 말과 첫 인연 뒤
2005년 부경 조교사 1기 데뷔
다리 저는 ‘루나’ 명마로 탈바꿈
영화 ‘챔프’의 우박이 실제모델
韓경마 최초로 1500승 달성
순수 순위 상금 1061억 달해
‘최고가 되자’ 목표 이루고 은퇴
“치열한 경쟁 벗어나 홀가분해
앞으로도 말과 함께 호흡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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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관 조교사가 지난 13일 경기 과천 렛츠런파크서울 경마장에서 한국마사회 소속 경주마와 다정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백동현 기자 |
과천 = 정세영 기자
“어서 말해보게. 내가 왕이 될 상인가 말이야.”
지난 2013년 개봉한 사극영화 ‘관상’에서 훗날 세조가 되는 수양대군(이정재)은 관상쟁이 내경(송강호)에게 이렇게 물었다. 반면 대한민국의 마주(馬主)들은 그동안 자신의 말을 이 사람에게 선보이며 물었다. “이 말이 일등 할 말입니까.” 조교사(調敎師) 김영관(65). 그는 사람이 아니라 말의 관상을 보고 명마를 가려낸다. 그에게는 ‘현대판 백락(伯樂)’이라는 별칭이 따라다닌다.
백락은 춘추전국시대 소금장수의 마차를 끌던 보잘것없는 말의 능력을 알아보고 초나라 왕의 천리마가 되게 했던 전설의 상마가(相馬家·말을 감정하는 사람)였다. 실제로 그는 ‘마생역전(馬生逆轉)’의 스토리를 일궈낸 인물이다. 2001년 제주도 조그만 민간목장에서 왼쪽 다리를 저는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말 ‘루나’를 대한민국 최고의 경주마로 키웠다. 경매시장에 나올 때마다 외면받았고 역대 최저가인 970만 원에 어렵게 낙찰된 말을 세심스럽게 보살피고 훈련시켜 은퇴할 때까지 33경기에서 13승, 자기 몸값의 78배에 해당하는 총상금 7억5700만 원을 기록한 말로 만들었다. 루나는 2011년 차태현이 주연한 영화 ‘챔프’의 경주마 ‘우박이’의 실제 모델이다.
김 조교사는 한국 경마계에 크고 굵직한 발자취를 남긴 입지전적 인물이다. 실제로 김 조교사가 작성한 기록과 업적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대상경주 71회 우승, 한국 경마 역사상 최초 1500승 달성, 최우수 조교사 13회 수상 등 한국 경마인 중 한 손에 꼽히는 화려한 성공신화를 썼고 경마 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1500승은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김 조교사가 따낸 순수 순위 상금은 1061억 원에 이른다. 김 조교사는 우승 상금 배분율 8% 적용 시 85억 원을 수확했다.
지난 13일 경기 과천 렛츠런파크서울(서울경마공원)에서 만난 김 조교사는 “사실 조교사를 하면서 마음고생이 심했다. 주변에선 아마 날 ‘얄미운 사람’으로 볼 것이다. 성적으로 모든 것을 증명하는 이곳에선 시기, 질투는 당연하다. 돌이켜 보면, 매 순간 최선을 다하다 보니 오늘의 내가 있었고,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늘 이기려 했다. 내일은 더 나아야 한다는 게 내 모토”라고 했다.
1960년 전남 무안에서 태어난 김 조교사는 10대였던 1976년, 작은아버지의 추천으로 기수(騎手)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기수는 인연이 아니었다. 갑작스레 체중이 늘어나면서 큰 어려움을 겪었다. 기수 일을 포기하고 장사를 시작했을 무렵, 김 조교사에게 뜻밖의 기회가 왔다. 기수를 하면서도 틈틈이 경마를 공부하던 그에게 후한 점수를 준 한 마주의 호출을 받았고, 김 조교사는 마필 관리사로 전향했다.
이때부터 말과 관련된 지식과 관리기술을 본격 축적한 김 조교사는 2005년 부산경남경마공원 개장과 함께 부경 조교사 1기로 정식 데뷔했다. 이후 그는 승승장구했다. 조교사는 마주와 경주마 위탁관리 계약을 맺고 경주마의 훈련과 관리, 출전경주 설계와 전략까지 총괄하는 역할을 한다. 프로야구에 비유하면 감독과 같은 자리다.
그런데 김 조교사는 조교사의 덕목 중 하나인 옥석을 가리는 데 탁월하다. ‘백락’이라는 별명처럼 김 조교사는 한국 경마사를 수놓은 화려한 명마들을 배출했다.
그에게 빼놓을 수 없는 명마 ‘루나’의 성공은 단점보다 장점을 본 그의 혜안 때문이었다. “선천적으로 부족한 점이 있었지만, 최고의 명마였다. 스타트를 딱 끊었을 때 100이라는 에너지를 100m 구간에서 쓸 힘, 500m 구간에서 사용할 힘, 마지막 구간에 사용할 힘을 딱딱 맞춰 쓰는 말이다. 자동차를 예로 들면, 막 달리는 게 아닌 사람이 기어를 넣으면 기어 수에 따라 루나가 딱딱 맞춰 달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여기에 루나의 심장은 튼튼했고 지구력은 물론, 스피드도 좋았다. 정말 영리한 사람과 같은 말”이라고 회상했다.
이후에도 김 조교사는 17연승이라는 대기록을 작성한 ‘미스터파크’를 비롯해 대통령배 4연패에 성공한 ‘트리플나인’은 물론, ‘파워블레이드’ ‘즐거운여정’까지 한국 경마의 대표적인 말들과 호흡을 맞췄다. 김 조교사는 “루나와 함께 즐거운여정이라는 말은 대상경주에서만 9개의 트로피를 들었다. 조교사 인생 황혼길을 즐겁게 해준 말이었다”고 설명했다.
김 조교사는 부지런함을 타고났다. 그의 기상 시간은 새벽 5시 전후. 간단한 조식을 하고 마방을 둘러보며 말들의 상태를 꼼꼼히 점검한다. 그리고 한 달에 2차례 이상은 제주로 가서 자신이 돌봐야 하는 말을 직접 찾아 꼼꼼히 관찰한다. 경매시장에 나온 말을 체크해 추천하는 것도 김 조교사의 임무. 1년 365일 중 대부분의 시간을 밖에서 보내는 김 조교사는 늘 가족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 김 조교사는 “상마법의 비결은 특별한 게 없다. 말의 혈통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부마(父馬)와 모마(母馬)가 어떻게 뛰었는지, 해당 말의 누나와 형이 어떻게 뛰었는지를 잘 봐야 한다. 하지만 이런 혈통이 좋은 말이 다 성공하는 건 아니다. 혈통도 중요하지만, 말을 어떻게 세심하게 살피느냐가 제일 중요한 본질”이라고 강조했다.
김 조교사는 오는 29일 마지막 레이스를 갖는다. 기수 시절까지 포함하면 약 50년을 경마에서 보낸 그는 “시원섭섭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시원한 감정이 80%, 아쉬운 마음이 20%인 것 같다”면서 “내가 가진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전수해 주고 가고 싶지만, 이곳은 치열한 경쟁 무대다. 내가 아무리 좋은 뜻으로 다가서려고 해도 쉽지 않은 곳이기에 이런 점은 아쉽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김 조교사는 “한국 경마는, 특히 마사회는 나를 성공의 길로 이끌어준 곳이다. 마사회 소속으로 기수부터 조교사까지 정말 인생에 변수 없이 정상까지 왔다. 처음엔 ‘최고가 되자’라는 목표로 이곳에 왔는데, 이제는 남들이 많이 부러워하는 경마인이 됐다. 내게 기회를 준 마사회, 부산 경마장에 감사하다”고 고개를 숙였다.
김 조교사는 은퇴 후 어떤 삶을 꿈꾸고 있을까. 김 조교사는 “50년간 말과 함께 지냈다. 앞으로도 그렇게 시간을 보낼 것이다. 과거와 다른 점이 있다면 경쟁에서 조금은 벗어난다는 점일 것 같다”면서 “말과 함께한 내 인생처럼 앞으로도 말과 같이 호흡하며 계속 시간을 보내겠다. 현역에서 은퇴하지만, 늘 한국 경마에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