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WTO 의식 배경에 '긴밀한 관계'
주요 분쟁서 WTO 조력 받은 전례 많아
보호무역 강화 아래 역할 축소
분쟁절차 회부 건수도 감소세
우리 정부가 세계무역기구(WTO)의 협정까지 위반해가며 반도체 보조금을 지급하는 ‘강수’를 두지 못하는 배경에는 우리와 WTO의 긴밀한 관계가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미지출처=로이터연합뉴스]
4일 업계 등에 따르면 정부는 당장 보조금 지급 시 생길 수 있는 ‘제소 리스크’도 우려스럽지만, 그보다 향후 있을 수 있는 무역분쟁에서 WTO의 조력을 받아야 하는 점 등을 고려해 보조금 지급을 쉽사리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WTO 분쟁해결기구(DSB) 제소 절차. 그림=아시아경제DB
우리나라는 무역에서 중요한 분쟁이 생길 때마다 WTO의 ‘분쟁해결절차’를 통해 탈출구를 마련해 온 경험이 있어 더욱 그렇다. 소송 방식으로 진행되는 이 절차에서 우리 정부는 여러 차례 승소했다. 대표적으로 2013년부터 우리 세탁기에 반덤핑 관세를 부과한 미국을 제소해서 2016년 9월 최종 승소했다. 미국이 판정을 이행하지 않자 우리 정부는 2018년 1월 미국을 상대로 연간 7억1100만달러(약 7990억원)의 양허정지(특정 품목의 관세를 낮추거나 없앤 것을 다시 부과하는 조치)를 WTO에 신청해서 2019년 12월 미국산 수입품에 대해 우리나라가 연간 약 950억원의 양허정지를 할 수 있다는 결정을 받아냈다. 일본이 후쿠시마와 주변 8개 현에서 나오는 수산물 수입을 금지하고 방사성물질 ‘세슘’이 나오면 추가 검사를 요구한 우리나라를 2015년 WTO에 제소한 사건 최종심(2019년 4월)에서도 WTO는 우리나라의 손을 들어줬다. 2019년 9월 한일 공기압 밸브 관세 사건도 쟁점 9개 중 8개에 대해 WTO는 우리 주장을 받아들였다. 2021년 1월 16억 달러 규모의 관세 분쟁에서도 우리가 미국을 이겼다. WTO는 이때 미국이 ‘불리한 가용정보(AFA)’ 조항을 한국산 제품에 적용해 부과한 관세 8건이 불합리하다고 판결했다. 2019년 9월에는 우리나라로 수출되던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 소재 3개 품목에 대해 수출 제한 조치를 시행한 일본을 우리 정부가 WTO에 제소했다가 지난해 3월 한일관계가 개선되자 취하했다.
하지만 2018년부터 미·중 무역갈등의 영향으로 세계시장은 ‘보호무역’의 경향이 강해졌고 이에 따라 자유무역을 유도하는 WTO의 기능과 역할도 유명무실해졌다. 분쟁절차 회부 건수도 2018년 38건, 2019년 20건, 2020년 5건 등 차츰 줄어 올해는 1~4월 한 건만 있었다. 분쟁이 생겨도 WTO에 제소하는 국가가 이젠 10개도 안 된다는 이야기다. 중국이 가장 최근인 지난달 26일 미국이 인플레이션감축법(IRA)에 따라 이뤄진 전기차 보조금을 차별적으로 집행했다며 미국을 WTO에 제소했다. 하지만 미국은 여전히 거액의 보조금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WTO가 이를 제어할 수 있을 것이란 전망도 전 세계적으로 많지 않다. WTO가 제대로 된 기능을 못 하는 상황이 지속되면 정부의 보조금 지급을 압박하는 업계의 목소리는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김형민 기자 khm193@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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