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스필버그를 향한 러브레터 《쥬라기 월드: 새로운 시작》
(시사저널=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1993년, 《쥬라기 공원》으로 인류 앞에 되살아난 공룡을 마주하는 경이로움과 공포를 경험한 지 3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할리우드는 여전히 공룡을 포기하지 못했다. 《쥬라기 월드: 새로운 시작》은 그 부제처럼 시리즈의 새출발을 알린다. 산뜻한 재회는 아니다. 말하자면 이 기획은 '리부트의 리부트'이기 때문이다. 2015년 《쥬라기 월드》라는 제목으로 시작된 리부트 3부작은 2022년 《쥬라기 월드: 도미니언》으로 이미 막을 내렸다. 전 세계 박스오피스에서 만족스럽지 않은 흥행 성적을 남기고 퇴장한 리부트 3부작 위에 새로운 이야기를 덮어 써내려가겠다는 건, 뼈대만 남은 프랜차이즈에 어떻게든 다시 심장박동을 부여하겠다는 의지다.
이번 리부트는 MCU의 블랙 위도우 역할을 졸업한 스칼렛 요한슨이 선택한 시리즈라는 점에서 우선 눈길을 끌었다. 메가폰은 《고질라》(2014), 《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2016), 《크리에이터》(2023)를 연출하며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새로운 기수로 자리 잡은 가렛 에즈워드 감독이 잡았다.
영화 《쥬라기 월드: 새로운 시작》 포스터 ⓒ유니버설 픽쳐스
원작 영화를 향한 헌정이 되고자 한 기획
《쥬라기 월드: 새로운 시작》의 초반 장면들은 놀라운 정도로 냉정한 자가 진단에서 출발한다. 마치 이 시리즈를 보기도 전에 진부함을 느낄 관객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한 태도다. 공룡이 돌아온 지 32년. 사람들은 더는 공룡에 열광하지 않는다. 테마파크는 수익성이 떨어진 지 오래고, 박물관 역시 하루 10명의 관람객을 간신히 채울 만큼 텅 비어있다. 뉴욕 브루클린 브리지 주변은 탈출한 초식공룡을 포획하려는 작전으로 아수라장이다. 사람들은 도심 한복판에 출몰한 공룡의 존재에 놀라워하기보단, 사태 수습 과정에서 발생한 교통 체증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드러내기 바쁘다.
이런 와중에도 누군가는 계산기를 두드린다. 진화한 공룡들을 이용하려는 세력들의 거대 음모는 의료 특허 경쟁으로까지 번진다. 이들의 결론은 심장질환을 줄일 수 있는 신약 개발을 위해 공룡들의 혈액 샘플이 필요하다는 것. 지구상에서 가장 큰 심장을 가진 생명체라는 이유에서다. 특수용병 조라(스칼렛 요한슨)는 거대 제약회사 파커 제닉스의 직원인 마틴(루퍼트 프렌드)으로부터 거액의 사례금과 함께 샘플 채취 작전을 제안받는다. 육지의 티타노사우루스, 수중 포식자인 모사사우루스, 익룡인 케찰코아틀루스까지 그야말로 육해공을 아울러야 하는 미션이다. 그사이 조라의 오랜 동료이자 선장인 던컨(마허샬라 알리), 고생물학자 헨리(조나단 베일리)도 이 모험에 가세한다.
그렇게 이들은 적도 부근의 외딴섬으로 향한다. 17년 전, 생명공학 기업 '인젠'이 돌연변이종을 연구하다가 불의의 사고가 일어나 모든 것이 멈춰있는 장소다. 중생대 지구의 기후와 가장 유사하기에 공룡이 서식할 수 있는 이 지역은 폐쇄된 연구소 부근을 제외하고 자연 그대로 남겨진 거대한 정글이다. 던컨의 말마따나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데다 늘 뭔가가 따라오는" 곳에서 벌어질 사투. 무기를 바짝 쥔 조라 일행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쥬라기 월드: 새로운 시작》에서 의외로 가장 크게 느껴지는 건 스티븐 스필버그의 존재감이다. 스필버그는 제작 책임(executive producer)으로 이름을 올리긴 했지만 연출에는 직접적 관여가 없다. 다만 이번 기획 자체가 원작 영화를 향한 가장 충실한 헌정이 되고자 했다는 점에서 무관하지 않다. 실제로 가렛 에즈워드 감독은 "스티븐 스필버그를 향한 러브레터"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영화 《쥬라기 월드:새로운 시작》 스틸컷 ⓒ유니버설 픽쳐스
영화 《쥬라기 월드:새로운 시작》 스틸컷 ⓒ유니버설 픽쳐스
뚜렷한 명분 없이 이어지는 공룡 소환
비단 《쥬라기 공원》뿐 아니라 영화 전반에서는 스필버그의 또 다른 연출작들인 《죠스》와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의 향수가 느껴지기도 한다. 망망대해에서 인간을 공격하는 거대 공룡 모사사우루스와 사투를 벌여야 한다거나, 고대 사원을 연상케 하는 공간 속 케찰코아틀루스의 둥지에서 위험천만한 모험이 벌어지는 식이다. 여름 블록버스터의 왕관을 쓰기 위해 이 모든 영화와의 공조를 꾀하는 전략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다만 달리 말하면 《쥬라기 월드: 새로운 시작》이 독자적 매력을 잘 갖춘 작품이 아니라, 기존 인기 시리즈의 장점들을 조금씩 빌려와 간신히 이어진 명맥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쥬라기 공원》으로부터 이어지는 아이들의 사투는 이번 영화에서 루벤(마누엘 가르시아-룰포) 가족이 이어받는다. 그는 두 딸 테레사(루나 블레이즈)와 이사벨라(오드리나 미란다), 테레사의 남자친구 자비에(데이비드 이아코노)까지 함께 작은 요트로 바다를 횡단하다가 모사사우루스의 습격을 받고 난파당한 뒤 조라 일행에게 구조된다. 민간인 출입이 금지된 섬에 당도한 특수대원 무리와 한 가족, 두 그룹은 어떤 이유로 따로 분리된 채 공룡이 득실거리는 섬을 가로지르는 여정에 나선다.
조라를 비롯한 새로운 캐릭터들의 하나같이 납작한 과거 사연들이 좀처럼 풍성하게 펼쳐질 기회를 얻지 못하는 동안, 1993년 원작 영화의 데자뷔 혹은 의도적인 오마주 장면들은 영화 곳곳에서 부지런히 발견된다. 티타노사우루스들을 마주하고 그들을 가만히 쓰다듬는 조라 일행의 모습은 눈앞에서 브라키오사우루스를 발견하고 경이에 몸을 떨었던 《쥬라기 공원》의 알란(샘 닐) 박사와 겹쳐 보인다. 아이들과 벨로시랩터 사이의 긴장감 넘치던 주방 추격전은 이사벨라의 재치 어린 도망 장면으로, 조명탄을 이용한 희생 어린 탈출은 던컨의 몫으로 이어지는 식이다. 이는 스필버그 감독 연출작의 각본가로 참여한 데이비드 코엡의 참여와도 어느 정도 연관이 있는 대목으로 보인다.
그러나 과거의 영광을 재연하기에는 여러모로 역부족이다. 급류에 휩쓸리는 루벤 가족과 이 시리즈의 '스타 캐릭터'인 티라노사우루스 렉스, 일명 티렉스의 추격전 같은 만족스러운 시퀀스도 일부 존재하긴 한다. 다만 진흙땅에 찍힌 거대한 발자국, 포식자의 모습은 아직 전혀 드러나지 않았지만 매달려 있던 염소가 사라진 것만으로 최고의 스릴을 선사했던 《쥬라기 공원》 특유의 긴장과 재미는 휘발된 지 오래다. 공룡이라기보다 에일리언에 가까운 생김새를 지닌 돌연변이 디스토투스렉스가 등장하는 순간은 공포와 놀라움보단 일말의 불쾌감이 앞선다. 기이한 크리처를 보는 게 목적이라면 그건 반드시 이 영화가 아니어도 된다.
처음의 미덕을 닮아가고자 하는 의미는 보였으나, 이 시리즈는 이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처음 창조했던 세계의 경이와는 온전히 멀어졌다. 시리즈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기 위한 노력은 직전 작인 《쥬라기 월드: 도미니언》에서 원년 멤버들을 복귀시키는 노력까지 감행하며 이뤄졌지만, 주지하다시피 그 역시 실패였다. 시각적 스펙터클과 돈벌이를 위해 유전자 조작으로 멸종한 생명까지 불러왔던 인간들의 오만은 자꾸만 별다른 매력 없이 변주되는 이 시리즈의 아이디어를 둘러싼 무심함을 닮았다. 스크린에 자꾸만 공룡이 소환되어야 하는 필요는 무엇인가. 공룡은 이미 너무 오랜 시간 시달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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