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노필의 미래창
스위스 피카르 가문 3세 베르트랑
2028년 9일간 무착륙 비행 계획
탄소배출없는 청정에너지 시대 ‘꿈’
지난 5월8일 수소비행기 ‘클라이밋 임펄스’ 제작 현장 공개 행사에서 조종석에 앉아 있는 베르트랑 피카르. 클라이밋 임펄스 제공
스위스에는 이 나라가 자랑하는 세계적인 과학 모험가 집안이 있다. 3대에 걸쳐 100년 이상 과학 모험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피카르 가문이다.
피카르 3대는 과학 지식과 탐구 정신을 바탕으로 생명까지도 위험에 처할 수 있는 모험 세계에 직접 뛰어들어 인류 문명의 지평을 넓히는 데 기여해 왔다. 후세의 사람들이 안전하게 갈 수 있는 길을 닦기 위해서다.
할아버지부터 시작된 전통을 잇고 있는 3대 베르트랑 피카르(1958~)가 2028년을 목표로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고 있다. ‘클라이밋 임펄스'(Climate Impulse)라는 이름의 수소연료전지 항공기를 이용한 세계 일주 비행 계획이다. 자신과 부조종사 2명이 번갈아 조종간을 잡고 고도 3000m의 적도 상공에서 9일 안에 지구를 한 바퀴 돈다는 구상이다. 성공할 경우 세계 최초의 무착륙 무탄소 세계 일주 비행이라는 기록을 세우게 된다. 2028년 만 70살이 되는 그에겐 사실상 마지막 도전이다.
2024년 2월 이 계획을 처음 발표한 그는 지난 5월 1년간의 비행기 제작 상황을 공개하는 행사를 가졌다. 이에 따르면 날개 폭이 34m에 이르는 수소비행기는 11㎥ 용량의 수소탱크 2개를 탑재하고 내년 중 첫번째 시험비행을 실시할 예정이다. 화물까지 합친 최대 탑재용량은 5.5톤이다.
세계 최초로 무착륙 무탄소 세계 일주 비행에 도전하는 수소비행기 ‘클라이밋 임펄스’ 조감도. 클라이밋 임펄스 제공
수소비행기는 수소와 산소를 반응시켜 전기를 생산하는 수소연료전지를 통해 동력을 얻는다. 물을 전기분해하면 수소와 산소가 나오는 원리를 거꾸로 이용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수소비행기에선 온실가스가 아닌 물이 배출된다. 그는 특히 청정연료의 의미를 최대한 살리기 위해 녹색 수소를 연료를 사용할 계획이다. 녹색 수소는 태양광, 풍력 등 재생 에너지로 물을 전기분해해 만든 수소를 가리킨다.
베르트랑은 최근 전기전자분야 매체 ‘아이트러플이(IEEE) 스펙트럼’과의 인터뷰에서 “이 프로젝트는 또 다른 미래가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며 “내 인생의 마지막을 맞이하는 지금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이라고 말했다.
공기역학을 고려한 비행기 설계는 에어버스가 맡았고, 비행 중 수소를 영하 253도의 액체 상태로 유지하는 기술을 포함한 항공기 제작은 아리안그룹 등의 도움을 받아 과학기업 시엔스코가 진행하고 있다.
상대적을 짧은 거리를 달리는 수소자동차는 비교적 다루기 쉬운 고압 기체수소를 사용하는 반면, 장거리 비행을 목표로 하는 수소항공기는 에너지 밀도가 높은 액체수소를 사용해야 한다. 9일이라는 긴 시간 동안 극저온 액체 상태를 유지하며 액체수소가 가능한 한 서서히 기화하도록 하는 것이 수소항공기 상용화의 핵심 기술 과제다. 베르트랑의 이번 비행은 이 기술적 난제를 극복하려는 시도의 일환이다.
그는 현재 비행기 제작은 40%의 공정률을 보이고 있으며, 시험비행에선 작은 수소 탱크를 사용하다 실제 비행에선 더 큰 복합소재 탱크를 장착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는 수소비행기는 전기모터를 사용하기 때문에 소음이 없다는 점도 강조했다.
2016년 베르트랑 피카르가 세계 일주 비행에 성공한 태양광 비행기 솔라임펄스2. 솔라임펄스 제공
정신과 의사 출신인 그는 앞서 1999년 ‘브라이틀링 오비터 3호’란 이름의 열기구로 사상 첫 무착륙 세계 일주에 성공했다. 이어 2015년엔 화석연료 없는 세상을 개척한다는 꿈을 담아 태양광 비행기 ‘솔라 임펄스2’로 세계 일주에 나서 1년4개월만에 목표를 달성했다.
하지만 ‘솔라 임펄스’ 비행에서 16번이나 중간 기착을 해야 했던 게 못내 아쉬웠던 그는 다음엔 수소 비행기로 태양광 비행기가 이루지 못한 무착륙 세계 일주 비행에 도전하기로 했다. 이후 청정에너지 수소 홍보에 적극 나서 2019년엔 현대차 수소전기차 넥쏘를 몰고 778km를 달려, 당시 1회 충전 주행거리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베르트랑이 비행을 통한 과학 모험가의 길을 걷게 된 데는 10대 시절 고소공포증에 맞서기 위해 행글라이딩을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됐다. 1985년 유럽 행글라이딩 곡예비행대회에서 우승한 그는 이후 열기구, 항공기로 영역을 넓혀갔다. 그가 정신과 의사가 된 것도 극한 상황에서의 인간 행동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스위스가 자랑하는 세계적인 모험가 피카르 집안 3대. 왼쪽부터 1대 오귀스트, 2대 자크, 3대 베르트랑. 위키미디어 코먼스
피카르 집안의 과학 모험 전통은 그의 할아버지 오귀스트 피카르(1884~1962)에서 시작된다. 오귀스트는 물리학자이자 발명가이자 탐험가였다. 그는 1931년 자신이 발명한 가압기구를 타고 인류 최초로 1만5781m 성층권까지 올라갔다. 그가 성층권 여행을 위해 발명한 여압실은 오늘날 우주 탐험의 토대가 됐다. 여압실이란 기압이 낮은 고도를 비행하는 항공기에서, 지상의 기압에 가깝게 공기 압력을 높여 놓은 방을 말한다. 그는 성층권에서 커다란 지구의 곡면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한 최초의 인간이었다. 그는 이 원리를 해저 탐사에도 적용해 최초의 심해잠수정 바티스카프를 만들고, 1953년 직접 깊이 3150m까지 들어가 심해 탐사의 길을 열었다.
아들 자크(1922~2008)는 해양학자로 평생 바다와 호수 보호에 앞장섰다. 자크는 아버지의 기록을 확장시켰다. 심해잠수정을 타고 1960년 지구에서 가장 깊은 마리아나해구의 1만911m 바다 밑까지 잠수했다. 이는 2019년 빅터 베스코보가 1만927m 잠수에 성공할 때까지 약 60년간 가장 깊은 잠수 기록이었다. 그는 특히 그곳에서 납작한 심해어들을 발견함으로써 환경 보호의 범위를 심해로 확대했다.
과학 모험의 전통은 베르트랑의 직계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의 할아버지 오귀스트의 쌍둥이 형제 장 펠릭스 피카르와 그의 부인 역시 열기구 조종사였으며, 그의 아들 도널드 피카르는 열기구를 타고 처음으로 영국해협을 횡단비행하는 기록을 세웠다.
베르트랑은 2009년 테드(TED) 강연에서 피카르 집안의 모험 정신에 대해 “우리 집에서 ‘뭔가 불가능하다’는 말은 오히려 우리가 그 일을 시도해야 하는 이유였다”고 말했다.
베르트랑은 지난해 스위스 일간지 ‘르탕’에 기고한 칼럼에서 “미국항우주국은 이미 60년 전에 우주선에 액체 수소를 사용했다”며 “항공기에 같은 기술을 적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하지 말라”고 말했다.
곽노필 선임기자 nop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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