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런 튜링 논문 인쇄본, 경매서 고가에 낙찰
2차대전 때 독일군 암호 해독
영국 승리 이끈 천재 수학자
친구에게 준 논문 사후 방치
후손들 재발견 세상 밖으로
박사학위 논문 등 희귀자료
"위대한 과학자 정신 기릴 것"
앨런 튜닝의 초상화와 그가 쓴 논문 인쇄본들. 희귀도서경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대 초, 영국 런던 북서쪽 블레츨리 파크에는 '독일군의 암호 메시지'가 수시로 날아들었다. 영국군이 도처에서 가로챈 적군의 메시지들이 이곳의 암호 해독 비밀부대에 전달된 것이다. 비밀부대는 '에니그마'라 불린 독일군의 복잡한 암호 체계를 해독하려 밤낮없이 매달렸지만 계속 실패했다.
난공불락의 암호를 해독해 전쟁의 판세를 뒤집은 사람은 천재 수학자 앨런 튜링이었다. 오늘날 '인공지능(AI)의 아버지'로 유명한 튜링은 이 비밀부대 소속으로, 에니그마를 뚫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에니그마를 1시간 만에 해독하는 '브리티시 봄베'를 개발한 것이다. 암호는 다 뚫렸고 정보는 모두 털렸다. 이후 영국군은 독일군의 공세가 예상되는 지점과 시기를 모두 파악해 대응했다. 수학자 한 명이 인류의 역사를 바꿔놓은 것이다. 이 일화와 튜링의 일생은 '이미테이션 게임'이라는 영화로도 유명하다.
18일 과학기술계에 따르면 17일(현지시간) 영국 중북부 노팅엄셔에서 열린 한 행사에서 에니그마를 해독하는 근원이 됐던 튜링의 논문 인쇄본이 경매에 부쳐졌다. 이 역사적 문서와 박사 학위 논문 등 튜링의 여러 논문 인쇄본이 합쳐진 것으로, 46만5400파운드(약 8억5770만원)에 낙찰됐다.
경매를 진행한 '핸슨스옥셔니어'의 찰스 핸슨 경매사는 "예상 판매가의 세 배가 넘는 금액으로 판매됐다. 튜링은 시대를 앞서간 사람이었고, 논문 인쇄본을 통해 우리와 계속 존재한다는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라고 평가했다.
튜링은 영국의 컴퓨터 과학자이자 수학자다. 그는 범용 컴퓨터의 모델로 간주되는 '튜링 기계'란 개념을 제시했는데, 이는 스스로 생각하고 다양한 작업을 할 수 있는 기계다. 기계적인 방식으로 참과 거짓을 판단할 수 있는지 수학적으로 입증했으며, 이 과정에서 튜링 기계의 개념을 처음 도입했다.
이는 기계가 인간의 사고 과정을 모방할 수 있는 능력까지 갖췄다는 것을 입증했다. 튜링 기계는 현재의 AI 연구의 시발점이 됐다. 그의 업적을 기려 영국의 50파운드 지폐에는 그의 초상화가 새겨졌다.
인쇄본들이 경매에 나오게 된 스토리도 흥미롭다. 영국의 한 오래된 가옥 다락방에서 발견된 이 문서들은 튜링의 어머니인 에설 튜링이 아들의 친구이자 동료 수학자인 노먼 라우틀리지에게 선물한 것이다. 2013년 라우틀리지가 사망하고 난 뒤 인쇄본들은 여동생의 집 다락방에 10년 가까이 처박혀 있었다. 오래된 폐지쯤으로 여겨 파쇄 위기까지 갔지만, 버려지기 직전 라우틀리지의 조카들이 가치를 알아보면서 기적적으로 빛을 보게 됐다.
핸슨스옥셔니어에 따르면 이날 경매에는 '튜링의 증명'으로도 알려진 튜링의 1936년 논문 '계산 가능한 수에 대해(On Computable Numbers)'의 인쇄본도 나왔다. 이 논문은 튜링의 박사 학위 논문과 함께 이론 컴퓨터 과학 분야의 기초연구로 평가받으며 본격적인 컴퓨터 시대를 연 첫 번째 프로그래밍 매뉴얼로 묘사된다. 1952년 출간된 튜링의 마지막 저서인 '형태 발생의 화학적 기초(The Chemical Basis of Morphogenesis)'와 에설 튜링이 라우틀리지에게 아들의 논문을 설명한 이유를 담은 손편지 등도 경매에 올랐다. 당시 이 논문 인쇄본들은 소량으로 생산돼 학계에 배포됐다. 현재는 찾아보기 매우 힘든 희귀한 자료들이다.
짐 스펜서 희귀도서경매 이사는 "내가 다뤄본 경매 물품 중 가장 중요한 자료이자 일생에 한 번뿐인 발견"이라며 "이번 경매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정신을 기리기 위한 일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고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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