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권 미디어 속 여성들의 임신, 일터의 임산부를 다루는 법
[최해린 기자]
임신부의 삶만큼 대상화되는 동시에 신격화되는 삶이 있을까. 여성은 아직까지도 '임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승진에서 배제되는가 하면, 육아휴직 이후의 경력 단절 문제를 온몸으로 경험하기도 한다. 여성의 임신·출산·육아를 당연시하는 사회적 분위기와 '커리어우먼'에 대한 기대감이 중첩되면서, 많은 여성 시민은 '육아에 전념하는' 성녀인 동시에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거침없이 해치우는 '슈퍼맘'이 될 것을 요구받는다.
이렇게 교묘하고 모순적인 시선을 받는 직장의 임신부들을, 서구 미디어는 어떻게 묘사해 왔을까. '임신'을 작품 자체의 주제나 주요 소재로 다루지 않은 작품들 속에서 일터의 임신부를 다루는 방법을 세 단계로 나누어 파악해 본다.
여성을 치우기 위한 도구
전문적인 커리어를 지닌 여성이 영화·텔레비전 곳곳에 진출하기 시작한 90년대 초 ~ 00년대 초반까지는 '일'과 '육아'를 양립할 수 없는 개념으로 묘사하는 경향성이 강했다.
1990년 영화 <프레데터 2>에는 짧은 머리의 여성 형사 '레오나'가 등장한다. 인간을 사냥하는 외계인 '프레데터'를 쫓는 경찰 팀에서 홍일점 역할을 하는 동시에, 웬만한 남성 캐릭터보다도 '억센'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는, 매력적인 캐릭터다. 하지만 그녀의 역할은 임신부가 됨으로써 끝을 맺는다. 경찰대원을 몰살하던 프레데터가 레오나의 배 속에 아기가 있음을 알고서는 자비를 베풀어 준 것이다. 덕분에 레오나는 프레데터가 무자비한 살인마가 아니라 명예를 아는 사냥꾼임을 알아내지만, 이 사실을 주인공에게 전달하고 나서 레오나의 등장은 전무하다.
레오나의 임신은 그 자체가 일종의 '반전' 취급되며, 이후 그녀의 임신은 작품 외적으로는 해당 캐릭터를 편리하게 치위 버리기 위한 장치가 된다. 레오나가 아이를 가진 이후 경찰서에 남기로 했는지, 아니면 다른 선택을 했는지도 알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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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트콤 <빅뱅이론> 스틸컷 |
ⓒ CBS |
2000년대에는 '임신 이후의 삶'이 묘사되는 방법을 볼 수 있다. 유명 시트콤 <빅뱅이론>은 주요 인물 중 하나로 여성 미생물학자 '버나데트'를 운용했다. 항공 엔지니어 '하워드'와 결혼한 버나데트는 한동안 아이를 갖지 않았다가, 중후반 시즌에 다다르자 임신한다.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하는데, 버나데트가 임신을 결정한 순간 그녀의 캐릭터가 '엄마'로 압축되어 버린 것이다. 그나마 자주 언급되던 그녀의 제약회사 근무 사실은 별다른 해명 없이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하지만 버나데트는 레오나와 달리, 임신 이후 겪는 신체적·심리적 변화가 화면에 적극적으로 드러난다. 우울증과 조증을 반복적으로 겪는 등 격동적인 모습이 보이지만, <빅뱅이론> 속 남성 주연들에게 버나데트의 이러한 변화는 '거슬리는' 현상일 뿐이다. 작품 자체도 버나데트의 이러한 변화가 웃음거리라는 태도를 견지하면서, 임신과 직장에 관한 의미 있는 담론을 형성하는 데 실패한다.
이처럼 2000년대 초반까지의 미디어에서 사회적 진출에 성공한 여성 캐릭터의 임신은 그녀를 내러티브에서 지우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는가 하면, 여전히 임신 자체에 대한 신비화와 조롱을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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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콘스탄트 가드너> 스틸컷 |
ⓒ 유나이티드픽처스 |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
하지만 위 작품들과 비슷한 시기 개봉한 2005년 영화 <콘스탄트 가드너>는 여성의 임신에 대해 훨씬 담백한 태도를 내비친다. 작중 레이첼 바이스가 연기한 '테사'는 저돌적이고 당찬 성격의 인권운동가다. 이는 연인 '저스틴'과의 결혼 후에도, 심지어는 그와의 아이를 밴 후에도 변하지 않는 캐릭터의 축이다.
임신 직후 테사는 정착을 원하는 등 이전과 같은 삶의 유지를 주저하는 모습도 보인다. 하지만 테사의 임신은 그녀를 '엄마'로 축약하지 않으며, 그저 한 인물이 겪는 여정에 임신이라는 한 사건이 추가되었을 뿐임을 명확히 한다. 테사는 임신 이후에도 거대 제약회사의 음모를 밝히기 위해 취재에 나서고자 하는 등, 남편인 저스틴보다 자신의 '본업'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임신이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로 묘사된 것이다.
물론, <콘스탄트 가드너> 속 테사의 모습 역시 여성에 대한 신비화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 임신한 몸으로 취재를 거듭하던 테사가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일종의 징벌적 선택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녀의 죽음을 파헤치는 남편 저스틴이 그녀의 '순수하고 아름답던' 모습을 회상하는 장면 역시 선택적 묘사로 보일 가능성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는 <콘스탄트 가드너>가 남성 주연 작품이니만큼 임신 자체보다는 테사라는 캐릭터에 대한 우상화가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 적합해 보인다. 임신부의 캐릭터성을 완전히 소거하지 않고 여전히 주체적인 인물로 그려냈다는 것에서 2000년대 후반 ~ 2010년대의 묘사 경향성을 찾아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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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 <데드 링거> 스틸컷 |
ⓒ 아마존프라임 |
주체적 욕망의 구현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2020년대에는 임신부와 직장의 관계를 어떻게 묘사하고 있을까. 또 어떤 묘사가 추가되어야 할까. 그 답은 2023년도 드라마 <데드 링거>에서 찾아볼 수 있을 듯하다. 쌍둥이 산부인과 의사를 다룬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의 1988년 동명 영화를 리메이크한 <데드 링거>에는 <콘스탄트 가드너>와 마찬가지로 레이첼 바이스가 출연한다.
바이스의 1인 2역으로 완성된 쌍둥이 캐릭터 '엘리엇'과 '베벌리'는 여성의학의 대가인 동시에 엄청난 괴짜라는 점이 명확하게 묘사된다. 둘은 서로의 욕망을 위해 서로를 이용하는 공의존적 관계이며, 그 동시에 평생을 함께해 온 사업적 파트너이기도 하다. 엘리엇과 베벌리는 작중 자신들의 특수 기술을 이용한 분만 센터를 설립하기도 하는 등, 완전한 커리어우먼의 모습을 보여준다.
<데드 링거>에서 주인공의 임신은 도구다. 하지만 캐릭터를 버리거나 축소하기 위한 작품 외적인 도구가 아닌, 자신의 욕망 실현을 위한 작품 내적의 도구다. 유독한 쌍둥이 관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베벌리는 엘리엇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동성 파트너 '제너비브'와의 관계를 공고히 하고, 스스로 아이를 가지기까지 한다. 베벌리는 의사로서의 일을 이어갈 뿐만 아니라, 임신한 자신을 내세워 엘리엇의 마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목적을 분명히 한다.
베벌리의 임신은 '순수한 의도'에서 이루어진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 입체적인 경향성을 띠며, 지금까지의 묘사와는 또다른 가치를 지닌다. 임신이 커리어를 보유한 여성에게 불현듯 찾아오는 재앙이 아니라, 여성의 선택으로 인해 이루어지는 현상 중 하나에 불과함을 분명히 한 것이다. 베벌리의 임신을 둘러싼 주변 인물들은 전부 여성인데, 이는 그녀의 '선택적 임신'이 남성을 향한 '꽃뱀' 행위를 비롯한 여성 혐오적 관점으로 받아들여지는 회귀를 막는다.
이처럼, 서구권 미디어 속 임신부에 대한 묘사는 더디지만 점진적으로 발전해 왔다. 하지만 이러한 담론의 전진과 별개로, 현실의 임신부들에 대한 처우 개선은 아직 요원해 보인다. 2020년 BBC의 넬 맥켄지(Nell Mackenzie) 기자가 분석한 바에 의하면, 임신 가능성이 있는 여성 배우들에게는 아예 배역이 주어지지 않는 경우도 있으며 임신 후에는 작업 현장에서 언어적 괴롭힘에 노출될 가능성이 올라간다.
임신부와 경력 단절 여성에 대한 사회적·제도적 안전망의 확충과 동시에 보다 발전적인 논의와 묘사가 이루어지기를 염원해 본다. 작품과 현실이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 되어, 우리 사회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담대하게 제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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