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21일서울 종로구 광화문 동십자각 앞에서 열린 윤석열 즉각 체포·퇴진! 사회대개혁! 범시민 대행진 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응원봉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성동훈 기자
6·3 대선에서 ‘여성’이 사라졌습니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 거대양당에서 성평등 관련 공약을 찾을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민주당에선 ‘출산가산점’이란 듣도보도 못한 정책이 언급되며 논란을 만들어 내고 있어요. 오늘 점선면은 많은 독자님들도 분노하게 했을 ‘출산가산점’ 논란과 함께 주요 정당들이 여성 의제를 외면하고 있는 현실을 짚어보겠습니다.
여성 문제는 나중에 논의하자고?
먼저 출산가산점 논란이 어떻게 촉발된 건지 살펴볼게요. 민주당은 지난 12일 10대 공약을 발표하면서 ‘군복무 경력 호봉 반영’을 포함했습니다. 이에 한 유권자가 김문수 민주당 의원에게 이 공약이 ‘여성 차별 정책에 해당한다’는 취지로 문자메시지를 보냈고, 김 의원은 ‘여성은 출산가산점이 있을 것’이라고 답했어요. 이 대화를 캡처한 사진이 SNS로 퍼지면서 여성 유권자들을 중심으로 반발이 거세게 일었습니다.
‘출산가산점’이 대체 뭘까요? 비슷한 공약이 실제 나온 적이 있습니다. 새누리당(현 국민의힘)은 2013년 임신·출산·육아로 경력이 단절된 여성이 재취업할 때 가산점을 주는 제도인 ‘엄마가산점’을 도입하려고 했어요. 당시 미혼·난임 여성 등에 대한 역차별 논란이 일면서 흐지부지됐고요. 그 공약이 10여년 만에 ‘재탕’돼 민주당에 등장한 셈입니다.
지금 여성 유권자들이 분통을 터뜨리는 이유도 같습니다. 출산을 하지 않은 여성에 대한 차별이 될 수 있기 때문이죠. 박규리씨(28)는 경향신문 기자와의 통화에서 “여성이 취업하려면 애를 낳고 와야 한다는 건가. 난임 여성들은 어떡하나”라고 말했습니다. 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연구관은 “가임기 여성에게 가치를 두고 여성의 생물학적 책임을 다할 때만 사회적 보상을 한다는 차별적 시선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비판을 피할 수 없다”고 지적했고요.
출산가산점 논란은 거대 정당이 얼마나 여성 의제에 무관심한지도 상기시켰어요. 10대 공약에 성평등·여성 정책 공약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2022년 대선에서는 이렇지 않았어요. 민주당은 여성 공약을 별도로 발표했습니다. 이재명 당시 대선 후보는 ‘n번방 사건’을 취재해 공론화한 ‘추적단 불꽃’의 활동가 박지현씨를 캠프에 직접 영입하기도 했어요. 2030 여성 표심을 공략하기 위한 의도였지요. 하지만 이번 대선 공약에서는 여성 의제는 보이지 않습니다.
김문수 국민의힘 후보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약은 고사하고, 참담한 수준의 성평등 인식만 드러냈어요. 김 후보는 유세 현장에서 배현진 국민의힘 의원에게 “미스 가락시장”이라고 칭하며 여성을 대상화하는 시각을 드러냈어요. 이준석 개혁신당 후보는 여성가족부 폐지를 10대 공약에 올렸습니다. 3년 전 윤석열 당시 국민의힘 대선 후보의 공약이 다시 등장한 것이죠. 권영국 민주노동당 후보만 비동의강간죄 도입, 낙태죄 대체 입법 등 여성 정책을 핵심 의제로 내놨습니다.
이번 대선의 계기가 된 탄핵 정국에서 여성, 특히 2030 여성의 활약이 있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민주당은 응원봉을 들고 탄핵 광장을 지켰던 여성의 공을 잊은 듯합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이 후보는 지난 4월11일 후보 비전 발표 기자회견에서 광장에서 집회를 주도한 2030 여성에 대해 구체적 언급이 없는 이유를 묻자 “빛의 혁명은 국민들이라고 하는 거대 공동체 모두의 성과”라고만 했습니다. 민주당이 2030 남성 표심을 의식해 2030 여성이 중시하는 성평등 공약을 외면한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어요.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는 “광장에서 응원봉을 들었는데 정작 여성들의 목소리는 삭제됐다는 실망감, 허탈함, 자괴감의 목소리가 크다”고 지적합니다.
여성학자 정희진씨는 경향신문 칼럼에서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서 언제나 여성은 보이는 곳에서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헌신한다”며 “한국 사회에서 현실 정치권을 포함한 범진보 세력의 ‘여성과 성소수자 문제는 나중에 논의하자’는 입장은 유래가 깊다”고 말해요. 그러면서 그는 “민주당에 필요한 과제는 ‘우클릭’이 아니라 겸손과 사회적 약자를 고려하는 정책”이라며 “민주당은 여성 입장에서 내키는 투표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했어요.
여성 요구를 반영한 공약은 ‘선택’이 아니라 ‘책임’의 문제입니다. 여성가족부가 매년 측정해 발표하는 국가성평등지수가 올해 사상 처음으로 하락했습니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발표하는 ‘유리천장지수’에서도 한국은 올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29개국 중 28위를 차지했습니다. 한국의 성별 임금 격차도 2023년 기준 OECD 회원국 중 꼴찌입니다. 딥페이크 같은 성폭력이나 여성 안전 문제도 심각하고요. 경향신문 사설은 특히 이번 대선은 후보 7명 중 여성이 한 명도 없어 여성 유권자가 대변자를 찾기 힘든 구도로 치러지고 있다고 지적했어요.
6월3일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습니다. 이제라도 주어진 책임을 다하겠다는 약속을 기다리는 유권자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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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설희 기자 so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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